욥은 하나님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답답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무엇을 믿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자기 길을 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고난당할 때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암담하고 망할 것 같습니다. 욥은 앞날을 하나님에게 일임합니다. 맡기면 아시는 분이 책임지십니다. 맡기면 편합니다. 둘째, 자신의 고난이 단련임을 믿었습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단련’은 인과응보와 다른 견해입니다. 인과응보는 고난을 죄의 결과로 봅니다. 고난이 종착점이고, 고난을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고난의 의미, 고난의 가치도 없습니다. 고난은 단지 벌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긍휼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단련은 고통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과정입니다.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다음 단계를 위해 꼭 있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욥은 단련한 ‘후에는’이라고 말합니다. 단련에는 ‘후’가 있습니다. ‘후’가 기대됩니다. 단련은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을 안고, 희망 때문에 단련을 받습니다. 이전의 욥은 죽으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고난을 단련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순금 같이 되어 나올 것을 믿었습니다.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순금은 불순물이 없는 좋은 금을 말합니다. 욥은 단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더 좋게 빚어져 값진 존재가 될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 과정을 죽음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망했고,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을 품고 감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설사 죄의 대가라 할지라도, 단련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최후의 심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교만을 거두고, 세상 욕심을 제하고, 안목의 정욕을 잘라냅니다. 겸손, 영적 소원, 가난한 마음을 회복합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심령을 소유합니다. 그래서 당장은 아픔이었던 것이 후에 돌아보면 깊은 감사가 됩니다. 고난 받을 때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보이지 않고, 내가 가는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묵묵하게 단련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후에 순금이 되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Application: 순금 같이 되고 싶습니까?
One Word: 단련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