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절망이 개인적인 죄(3)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민족적인 죄악(8)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생각하면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고, 주 앞에 설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와 속량이 풍성하십니다(7).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에게 죄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주님 자신이 친히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수없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에게 배은망덕한 일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죄악에서 그들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시인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에게 나아가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1). 그의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주의 말씀을 바랐습니다(5). 여호와로 말미암아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고, 말씀만이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범죄했을 때 하나님에게 나아가 사죄의 은혜를 구했고, 주의 말씀을 앙망했습니다(시51:1-4). 시인이 여호와를 기다리는 열망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했습니다.
밤새도록 졸음을 참아가며 진영을 지키는 파수꾼이 얼마나 아침을 기다리겠습니까? 여호와를 향한 시인의 열망도 그와 같았습니다. 죄를 용서 받고 주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은 이처럼 시급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에게 나아갑니다(131:1). 젖 뗀 아이가 평온하게 엄마 품에 안기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 전폭적으로 의지합니다.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때 모든 염려가 사라지고 평안한 가운데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Application: 왜 여호와를 기다려야 합니까?
One Word: 인자와 속량이 주께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