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은 부정했습니다 (레 13:3). 부정하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또 사람들과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부정한 자와 접촉하면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 밖으로 격리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요? ‘ 나는 더럽다. 나는 다른 사람을 더럽게 한다. 나로 인해 세상이 더러워진다.’ 그는 예수님에게 와서 ‘ 병을 고쳐 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고, ‘ 깨끗하게 해 주세 요’ 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병의 아픔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더러움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 원하시면 ...’ 이라고 말할까요 ? 그는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았고, 싫어 버린 바 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 원하시면’ 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원함을 받지 못한, 어느 누구에게도 기쁨이 되지 못한 사람의 아픔과 고통의 절규입니다. 나를 제발 받아 주시라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나를 배척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 나는 더러운 자입니다’ 라 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 나는 원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라는 자기 인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결 코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습, 자신의 형편, 자신의 주제, 자신의 절망스런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그는 문드러졌습니다. 그러나 문드러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기에 그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절망의 때 가 희망의 때입니다. 내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약할 때이고, 내가 약하다는 인정할 때가 사실은 강할 때 입니다.
예수님은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고 응답하십니다. ‘ 내가 원하노니 ...’ 란 말씀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쳐주기 원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 나는 너를 원한다. 내 가 너를 영접한다. 나는 너를 기뻐한다. 나는 너를 열망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는 말씀입니다. 문둥병자를, 더러운 자를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의 더러운 몸에 대십니다. 문둥병자와 옷깃만 스쳐도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0m 이내로 접근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이 볼 때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 시 대에 충격으로 다가 오신 분이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를 통해 예수님이 그를 얼마나 원하시는가를 행동으로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이 더러운 세상에 들어오셨듯이, 또 그의 더러움의 세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사람을 어루만지신 것은 그의 마음의 고통을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먼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배척 당한 심령을 치료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문드러진 그의 속사람을 세우십니다. 저주받았다 는 생각에서 풀어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육체를 치료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를 깨끗게 하십니다.
Application: 주님에게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습니까?
One Word: 나를 원하시는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