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는’ 욥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젊은 자들이 욥을 비웃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비들은 욥의 양떼를 지키는 개보다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의 자녀들이 이제 욥을 조롱하며 놀립니다. 욥의 얼굴에 서슴없이 침을 뱉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욥을 힘없고 곤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욥의 길에 덫을 놓고 에워싸고 대적해도 욥을 돕는 이가 없습니다. 욥은 공포 가운데 그 생명이 녹아내립니다. 그의 육체도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욥은 주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를 돌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욥에게 잔인하게 대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은 욥이 죽기까지 고난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욥은 고난 받는 자,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며 섬겼습니다. 욥은 그렇게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광명 대신 흑암과 환난이 임했습니다. 그는 질고로 검게 된 얼굴, 짐승 같은 모습을 하고 통곡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합니다. 복이란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잘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개 우리가 바라는 복은 외적, 물질적, 육체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런 복을 안 주실 수 있습니다. 대신에 내적, 영적인 복, 정신적인 복을 주기 위해 고난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더한 축복, 진정한 축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복신앙이 진리가 아님을 알고 참된 복을 주시기 위해서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심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Application: 외적, 물질적, 육신적인 복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One Word: 연단을 통해 주시는 참된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