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11,12). 사십 주야 동안 비가 땅에 쏟아져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습니다(21,22). 힘 좋은 네피림이 다 죽었고, 외모를 뽐내던 여인들도 다 죽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요행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 무서웠습니다. 하나님은 물로 땅의 더러움을 철저하게 씻으셨습니다(23). ‘그 날이 오면.’ 어떤 사람은 희망의 그 날을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은 회복의 그 날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멸망의 그 날도 있습니다. ‘쓸어버리겠다’고 경고하신 그 날이 이릅니다. ‘태워버리겠다’고 경고하신 그 날이 이릅니다. 무서운 그 날입니다. 그 날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 날이 오면 나는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홍수로 땅을 쓸어버리실 때, 오직 한 군데만 쓸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방주 안이었습니다. “오직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23) 그래서 방주 안은 구원의 장소입니다. 방주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이 방주는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된 피난처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사람이 잘나고,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바르고, 옳고, 의로워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사람이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구원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방주를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또 하나님에게서 나와야만 구원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심판하실 하나님만이 구원의 길을 내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라고 하신 대로 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왜 배인가요? 왜 이리 큰가요? 꼭 이렇게 만들어야 하나요? 만일 고페르 나무가 부족해 모퉁이 한 칸을 참나무로 쓰면 어떨까요? 역청을 구하기 어려우니 안팎으로 역청을 칠하지 않고, 밖만 칠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방주 안에 있어도 홍수에 쓸려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을 겸손히 영접하고 그 구원의 방법으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이며, 살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5) 유대인이 볼 때는 십자가가 비위에 거슬리고(공동번역), 헬라인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노아 시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지 밝히 알게 됩니다. 왜 그리 큰 배를 만들라고 하셨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셨는지.
Application: 십자가 구원의 방주 안에 있습니까?
One Word: 다른 구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