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은 약 1000여년의 무게를 담고 있는 아담의 계보입니다.
첫째, 죽었더라. 아담이 930년을 살고, 므두셀라가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는.... 죽었더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왜 죽었음을 밝힐까요? 역사의 실증을 통해 하나님 말씀대로 되었음을 보여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죄를 지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거짓말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은 책임을 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에 책임을 지십니다. 이 계보를 볼 때 확실합니다.
둘째, ‘살았더라’와 ‘죽었더라’가 반복되는데, 한 번 다르게 나옵니다.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23) 에녹은 살기만 하고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23절은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어떻게 살기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죽음을 보지 않게 에녹을 데려 가셨기 때문입니다(24). ‘죽었더라’가 반복되고 있는 아담의 계보에서 ‘살았더라’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죽는 흐름 속에서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아~ 죽지 않을 수도 있구나!’ 죽음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살았더라’는 말씀은 영생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소망의 창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죽음에 질식하지 않도록 창을 열어 두셨습니다. 그 창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고, 꿈꾸고, 기다리게 하십니다.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의 길이 회복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길(예수님)을 걸어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됩니다.
셋째, 낳았더라. 이 계보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각 사람이 한 일은 믿음의 자녀를 낳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2). 몇 번 큰일을 하는 것도 힘들지만, 일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진정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것도 귀하지만, 평생에 걸쳐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의 자녀를 키우며 사는 것이 더 귀합니다. 믿음의 자녀 한 사람을 낳고 키우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아이를 통해 위로하십니다. 라멕은 수고하며 사는 삶에 지쳤습니다(28,29). 그때 하나님은 노아를 주셔서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믿음의 아이, 의로운 아이, 여호와 신앙을 가진 아이로 자라는 모습은 부모에게 최고의 위로입니다.
넷째, 남은 계보. 아담의 계보는 아담과 셋으로부터 노아로 연결되는 과정입니다. 나중에 보면 5장은 남은 자들의 계보로 이어집니다. 남은 자들의 계보에 오른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농기구를 만든 두발가인의 후손들이나 예술문명을 발달시킨 유발의 후손들은 세상을 편리하게 했지만 남는 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남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계보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후대에 전해야 할 것은 여호와 신앙입니다. 돈이나 지식이나 삶의 기술로는 남은 자가 될 수 없습니다.
Application: 나는 누구의 계보에 기록될까요?
One Word: 믿음의 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