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이를 듣던 자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그리고는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습니다. 한마디로 광란을 일으켰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될 줄을 몰랐을까요? 이방인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구원을 선포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방인에게로 갔다고 하면 뒤집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며칠 전에는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서원한 사람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서원하는 절차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치고, 머리를 깎아 제단 불에 태웠습니다(결례, 21:21-26). 이처럼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자유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배려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과 부르심에 대해서는 배려하지 않습니다. 즉, 복음에 대하여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양보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양보합니다. 복음을 위해 율법 있는 자도 되고, 율법 없는 자도 되고, 약한 자도 되고,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죽게 될지라도, 죽음의 위협에 내몰릴지라도 담대히 전합니다. 내가 받은 구원, 주님에게 부르심 받은 사명은 어떤 가운데서도 분명하고, 단호하고, 엄정하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또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일생을 통해 지켜가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 그것은 결코 타협할 수도, 양보할 수도, 변질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영원까지 계속되어야 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됩니다. 그 은혜로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게 됩니다. 그 복음을 잃어버리면 생명을 잃습니다. 복음이 변질되는 것이 타락입니다. 복음이 있는 사람도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타락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있으면 회복됩니다. 복음이 있으면 다시 깨끗해집니다. 그래서 복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변질되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Application: 복음의 사도로서의 부르심이 분명하십니까?
One Word: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