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너그러워서”(11).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너그럽고, 베뢰아 사람들은 더 너그러웠습니다. ‘너그럽다’(noble character)는 것은 ‘혈통이 좋은, 마음이 고상한(태도와 자세가 좋은)’이란 의미입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큰 무리의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영접했습니다(4,12). 첫째,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없을 때, 필요할 때 간절해집니다. 그들은 어떤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까?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2,3).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쳤고,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를 보면 그들이 죄와 죽음으로 인해 주리고, 헐벗은 심령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삶을 살았지만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죄와 사망 앞에 서면 간절한 마음이 됩니다. 둘째,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상고(詳考)는 자세히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내 것이 되고 내 안에 깊이 뿌리 내리려면 상고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진정 나의 그리스도이신가?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시 생각해 보고, 살펴보고, 되새겨 봅니다. 상고는 되새김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밤새도록 먹은 것을 되새김질하는 소는 소화불량이 없고, 영양분도 완전히 소화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구원과 부활이 내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구원이 나의 구원이 되고,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구원으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있고, 부활의 능력이 그 삶에 나타납니다.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서 논쟁하면서 거기에서 삶의 재미를 찾고, 거기에서 존재 의미를 얻으려 하지만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나타냈지만 너그러운 베뢰아 사람들은 상고, 즉 깊이 생각했습니다. 지식을 위해 말씀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삶입니다. 말씀은 인생입니다. 말씀은 사람입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녹아 들어와 내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열매 맺는 인생이 됩니다. 쓸 만한 사람, 건강한 사람을 만듭니다. 이를 위해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듣습니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와 감동이 되고,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성경 공부입니다. 한국 사람은 오래 묵혀 발효시킨 음식을 먹습니다. 공부도 반복해 암송하면서 뜻을 음미했습니다. 이로 인해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숙성 보다 속성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맛이 나지 않습니다. 깊은 맛을 모릅니다. 간절한 마음인가, 호기심인가? 깊이로 갈 것인가, 새로움을 좇을 것인가? 어떤 것이 복이 있을지 자명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그러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됩니다.
Application: 어떤 자세로 말씀을 받습니까?
One Word: 간절하게, 깊이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