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생명의 주관자인가’를 두고 두 가치관이 충돌합니다. 첫째는, 왕의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입니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15). 천하를 장악한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당장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왕의 손에 세 친구들의 목숨과 미래가 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라 평지에 모인 바벨론의 모든 고급 관리들은 그렇게 여겼기 때문에 금신상에게 절했습니다. 이처럼 왕이 생명을 주관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여호와 신앙을 접고 금신상에게 절하게 됩니다. 그리하고 나면 그것이 평생에 걸친 족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기가 어려워집니다. 일생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입니다. 두라 평지에 모인 많은 사람 중에서 오직 세 친구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17).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믿고 왕 앞에서 담대했습니다. 끝까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신앙을 선택했고, 지켰습니다. 그렇지만 망한 나라 백성의 고백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 왜 바벨론에 망했어?’ 세 친구들은 하나님이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실 것을 믿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18). 믿은 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바란 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곧 죽을 지라도, 불에 태워질지라도, 그래도 왕의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절하지 않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을 따라 살았습니다. 의와 진리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기대한 대로 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좋고, 내가 판단하기에 옳아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이면 그렇게 하지 않으셔야 감사합니다. 그러나 세 친구들이 믿고 바란 것은 신앙을 지키다가 풀무불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실망스럽지 않을까요? 그들의 죽음이 헛되 보이지 않을까요? 세 친구들은 그럴지라도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죽을지라도 신앙을 지키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시는 분은 선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바란 대로 행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비록 지금은 그 뜻을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이므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하지 않고 죽겠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좋으면 하나님께서 선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손해가 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합니다. 기준이 자기중심적이고, 이해 타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흔들립니다. 그리하셔도 믿고, 그리하지 않으셔도 믿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Application: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까?
One Word: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