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건축자)이 왜 예수님을 버렸을까요(11)? 건축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집(장로들의 유전의 집, 전통의 집)을 지으려고 했고, 거기에 맞춰 돌을 다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생각대로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그들 생각에 자신을 맞추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건축자들을 향해 예수님을 중심으로 집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 외에도 길은 많다’, ‘본래부터 진리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버려진 그대로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지으시는 집의 머릿돌(기준돌, 기초석)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버리는 사람도 많지만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을 맞추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하나님이 지으시는 집입니다. 그 집에 거하는 사람은 오직 머릿돌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12).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못 걷게 된 사람이 건강하게 된 것이 그 증거입니다(9,10,14). 오직 예수님을 머릿돌로 삼아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 머릿돌을 삼고자 하면 예수님을 버리게 되고, 그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이를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16).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말하지 못하도록 사도들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17,18).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하는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전혀 못 걷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된 일은 사도들이 보고 들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도 보고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도 보고 들은 것입니다. 사도들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요, 이론도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요,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은 보고 들음에서 나왔습니다. 실제 사건에서 나왔습니다. 만일 다른 이름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 이름이 구원의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름으로는 그런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그런 구원이 일어납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의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유일한 구원임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초대 교회도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Application: 누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까?
One Word: 오직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