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절은 이스라엘의 가식적인 신앙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께서 너희를 기쁘게 받으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5, 새번역). 금식은 몸과 마음에 고통을 줍니다. 그런데도 왜 금식합니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이 그러합니다. 또 큰 재난, 문제, 사건 사고가 그러합니다. 금식하면서 이로 인한 애통을 몸으로 느끼며 더 깊이 회개합니다. 그리고 더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의 회개와 간구를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것이 금식하는 이유입니다. 금식이 목적이 아닙니다. 금식이 자랑도 아닙니다. 금식을 위해 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를 위해 금식하는 것이고, 기도를 위해 금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회개와 기도를 받아 주시도록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금식하면서 오락을 구하고, 금식하면서 다투었습니다. 통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금식을 위해 금식했습니다. 그러고도 자신들은 금식하는데 주께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금식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자, 가난한 자, 약한 자의 필요를 채우는 금식을 기뻐하십니다. 금식은 하나님이 알아주시기를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자, 약한 자를 돌보는 것을 알아주십니다. 또 그렇게 할 때 진정한 금식으로 인정해주십니다. 음식은 먹지 않지만 뒤로는 가식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진정한 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기 원하고 하나님이 봐주시길 원한다면 단지 음식만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웃을 돌아보는 아픔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빛이 새벽 같이 비쳐 어둠이 낮이 됩니다(8,10). 상처 난 사람에게는 치유가 급속히 이루어지며 공의와 하나님의 영광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그들이 부르면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그들을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을 만족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게 만드십니다.
Application: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고자 합니까?
One Word: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